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김왕노 시집
(천년의 시작.시작시인선)
김왕노 시인의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이 시작시인선 301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시집으로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위독』 『사진 속의 바다』 『그리운 파란만장』 디카 시집 『게릴라』 『이별 그 후의 날들』 등이 있다. 시인은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가 주조主潮를 이루는 시편들을 발표하면서 충일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확립하였고 문단으로부터 그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아 제8회 한국해양문학대상, 제7회 박인환문학상, 제3회 지리산 문학상, 제2회 디카시 작품상, 제4회 수원시문학대상, 제24회 한성기 문학상, 2018년 올해의좋은시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은 저자가 시인의 말에서 밝혔듯이 “천년 우물물 같은 푸른 시로 채우는 고집”의 결실이다. 시인은 스스로를 고집쟁이라고 말하지만 그 고집이 ‘푸른 고집’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호기심과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고집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이전 시집들에서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를 시적 상상력으로 승화시켜 우리를 문학적 감동이 범람하는 시의 장으로 초대한 바 있는데, 이는 시인이 노래하는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가 일반적 문법이나 감상적 정념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인생에 대한 근원적 성찰과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사랑이라는 주제는 우주 만물에 대한 통찰에 도달하기 위한 인식론적 매개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그의 시에서 사랑은 시적 자의식의 차원으로까지 깊어지는 면모를 보이면서 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더불어 김왕노 시의 기저에는 세상을 향한 비판적 결기와 분노가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번 시집에서 간혹 거친 언어와 직정적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시인이 추구하는 “푸른 시”의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해설을 쓴 이형권 시인의 말을 빌리면 시인이 늘 “푸른 시”를 고집하는 이유는 “푸름을 상실하고, 문명의 이기와 속악한 욕망으로 갈변된 곳”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표4를 쓴 이건청(한국시인협회 평의원, 한양대 명예 교수)은 이번 시집에 대하여 “좋은 시는 깊은 미궁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독자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그 미궁의 근원을 찾아가면서 현란한 환희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김왕노의 작품들 속에서 그런 시편들을 만난다”라고 평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김왕노 시에서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가 하나의 의미체계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갈래로 의미망을 확장시켜 나간다는 점을 환기시켜 준다. 요컨대 시인은 시를 통해 비루한 현실 세계를 버리고 심미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며, 누구보다 시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이를 실현시키고자 한다. 이를 “시적인 믿음”이라 부른다면, 해설의 말처럼 그의 시가 “시적인, 너무도 시적인 믿음”이어서 믿음직스러우며, “시적 유토피아를 향한 김왕노 시인의 푸른 고집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다.
❚추천사❚
좋은 시는 깊은 미궁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독자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그 미궁의 근원을 찾아가면서 현란한 환희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시를 만나면 눈이 환하게 밝아진다. 김왕노 작품들 속에서 그런 시편들을 만난다.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이라는 표제의 시를 한 편 보기로 한다.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 할머니가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간다”. 이 시의 첫 2행은 퍽 돌발적이면서도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에서 이런 ‘익살’의 근원이 드러난다. 유모차에 실린 것이 유아가 아니라 “늙은 개”이며 늙은 개를 “모시고” 할머니가 꽃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의 서두가 의미론적 변용을 겪는다. 그리고 이런 의미론적 변용은 뒤에 보이는 “신라의 수막새에 그려진 천년 미소”와 이어지면서 전후의 맥락이 아주 너른 함축을 지니게 된다. 늙은 개를 모시고 가는 할머니의 골계 풍경은 신라 천년의 수막새의 웃음과도 치환되는 것이다. 할머니에게서 보이는
‘익살’이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가서 천년 전 “수막새”의 웃음과 합일된다. 천년의 시간과 풍상을 한 편의 시 속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은 퍽 귀한 것이다. 김왕노의 시편들이 보여 주는 깊은 인식과 견고한 구조력에 놀란다. 시집 간행을 축하하며 한국시사에 확연한 개성을 이뤄주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이건청(한국시인협회 평의원, 한양대 명예 교수)
조선후기 판소리 팔 대 명창 가운데 한 분이 주덕기이다. 그의 별호는 벌목정정伐木丁丁이었으니 소리를 익히던 그의 정성과 장함이 이와 같았다는 뜻이리라. 시단에서 김왕노의 시가 바로 벌목정정의 그것이다. 좌충우돌 진창의 이미지를 힘차게 헤쳐 나와 창랑滄浪에 이르는 그의 시편들은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그가 내리찍는 이미지들은 살아서 꿈틀대며 도망을 가다가 다시 붙들려 와 선연한 상처를 남긴 채 문자화된다. 그 모든 상황을 그의 시를 빌려 말하면 “단숨의 사랑”이라 할 것이다. 그 “단숨”을 영원으로 끌고 가려는 지고지순하면서도 철없는 김왕노의 시편들이
‘감감감 북을 치며(坎坎鼓我) 덩실덩실 춤을 추는(蹲蹲舞我)’ 지경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사람을 벌처럼 불러 모아 술을 한잔 내시라.
―우대식(시인, 숭실대 국문과 겸임교수)
❚저자 약력❚
김 왕 노 시인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문광부 지정도서)』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위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 『사진 속의 바다』(해양문학상 수상집) 『그리운 파란만장』(세종도서 선정) 디카 시집 『게릴라』 『이별 그 후의 날들』 등이 있음.
제8회 한국해양문학대상, 제7회 박인환문학상, 제3회 지리산 문학상, 제2회 디카시 작품상, 제4회 수원시문학대상, 제24회 한성기 문학상, 2018년 올해의좋은시상(웹진 시인광장) 수상.
현대시학회 회장, 글발 단장, 현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시와 경계』 주간.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말 없는 입 13
그리울 때마다 울었다 14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15
붉은 밤 16
파묘하는 봄 17
낙과 18
점박이 19
청춘은 뇌관 없이 찬방에 누워 20
덕적도 그 여자 21
블랙홀 22
도플갱어 24
월출이 형 27
봉선화 28
십오 촉 사랑 29
그리운 봉준이에게 30
제2부
진수성찬 33
만추 34
뱀의 전설 36
꽃 37
이념 서적에 대한 역학조사 38
지네 42
민들레 꽃씨 43
몽환의 집 44
녹우당 시편 1 45
녹우당 시편 2 46
염낭거미 47
유리 48
애련리 50
눈이 잘 보이는 저녁 52
시야, 시야 53
제3부
심야극장 앞을 지나며 57
격렬비열도에 사랑이 비로 내리고 58
해변에서 시간 59
소읍 60
두 개의 세상 61
그대가 잠들 무렵 62
소녀 시대 63
허공 궁전 64
모호한 술탄 65
나무의 울력 66
시집과 그것을 하다 67
세기말 장미에게 68
극에 달한 이별 69
술의 노래 70
호명 72
제4부
서천 간다 75
너를 꽃이라 부르고 열흘을 울었다 76
심해에서 78
풍년초 아버지 79
수국꽃 나라 80
짐승보다 못한 놈 82
푹푹 썩는 시 83
에버그린을 위하여 84
절교도 86
분꽃 88
여전히 개 같은 날들의 기록 90
어미의 마음 92
그리운 심부름 93
금곡 가랑잎 94
달동네 95
해설
이형권 울음과 타자를 위한 푸른 고집 96
❚시인의 말❚
시인의 말
고집이 세다. 똥고집이다.
역대급 고집이다.
죽음도 고집을 꺾지 못한다.
첫 시집을 천년의시작에서 내기 시작해
벌써 6번째 시집마저 천년의시작에서 낸다.
시집을 천년 우물물 같은
푸른 시로 채우는 고집도 부렸다.
푸른 시로 채우기 위한 고집은
끝내 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집 속의 시 한 편❚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
할머니가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간다.
바람이 불자 백 년을 기념해 팡파르를 울리듯
공중에 솟구쳤다가 분분히 휘날리는 복사꽃잎, 꽃잎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가는 할머니의 미소가
신라의 수막새에 그려진 천년 미소라
유모차에 유머처럼 앉은 늙은 개의 미소도 천년 미소라
백 년 복사꽃 나무 아래 천년 미소가 복사꽃처럼 피어나간다.
그리운 쪽으로 한 발 두 발 천년이 간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 앞에
지퍼가 열리듯이 봄 길 환히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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